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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릴리 슈슈의 고백 - 파수꾼 (윤성현, 2011)


궁금증을 자아내며 이야기를 시작해서 점점 고조시키다가 고요하게 불편한 마음으로 맺는 연출이 탁월.
십대의 허세와 상처, 방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
이제훈의 불안하고도 분노에 찬 눈빛이,
이와이 슈운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또 시간을 뒤집고 시점을 제한해서 조금씩 정보를 흘려 오해를 만들었다가 풀고, 또 다시 오해를 만들었다가 풀고 하는 모양새가,
나카시마 테츠야의 <고백>을 닮았다.

하도 화제라길래 보려다가, 너무 마음이 어두워질까봐 미루고 미루던 차에 오늘 저녁 식후 용기 내어 겨우 봤는데,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불편한 감정이 지속되어,
저녁 먹은 게 소화가 안 되고 그대로 더부룩한 상태.ㅋ

누군가 훔쳐간 나의 '서지원 1집' 테이프를 찾으려고 반 아이들을 앉혀놓고 "내가 뒤져서 나오면 죽인다"고 호통 쳤던 친구와,
합주가 잘 되지 않아서 짜증 냈던 내게 "싸가지 없는 새끼"라며 뺨을 후려친 친구와,
노안을 앞세워 슈퍼마켓에서 산 레몬소주, 체리소주와,
하루하루 차곡차곡 그 병들을 쌓는 것으로 우정을 증명하려 한 우리와,
그 병들을 우리가 쌓는 것보다 빨리 치움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 한 수위아저씨와,
우리의 우정의 증명을 훼손한 수위아저씨를 향한 분노로 병을 산산조각냈던 일과,
수위아저씨의 권능으로 옥상으로 나가는 문을 잠근 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을 따서 옥상에 올라 아버지의 심부름이라고 해서 산 '하나로'를 피다가 구역질 했던 일과,
어우, 도저히 못 피겠다 싶어서 남은 18개피를 한꺼번에 불에 태우면서 바라본 파란 회색의 연기와,
골뱅이와 소주만 마시면 토하고 쓰러졌던 나의 술버릇과,
책 한 권 읽지도 않은 각자의 개똥철학으로 서로의 인생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품평하던 그 시절의 수다,
이 모든 게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싸움의 시작과 지속에는 양쪽의 끊임 없는 기여가 있기 마련인데,
사실 어느 하나가 태도를 바꾸기는 쉽지 않으며,
또한 어느 하나가 바꿔도 다른 한쪽은 오히려 반발로 더 엇나가기도 하고,
그럴 때 먼저 태도를 바꿨던 한쪽이 엇나가는 상대방을 보며 폭발해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기태의 폭발에서 실은 나의 모습을 봤다.
마지막으로 폭발했던 때가 언제더라...
분노와 불안이 꽉 차있는 기태의 눈빛,
나는 내가 조금은 무섭다.

남성 드라마이긴 하지만, 파국은 역시 여성이 방아쇠가 되었달까.
하긴, 삶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사건, 사고들이 우스갯소리로 "여자 아니면 돈"이라니깐.
결국 똘똘한 연출을 빼고 본다면 그저 전형적인 십대 성장 영화일 수 있지만,
그나마 이 영화의 인물들은 성장도 안 할 뿐더러,
우리네 삶이 실은 이렇게 전형적이지 않은가 말야.

그나저나, 이제훈의 불안하고 분노에 찬 눈빛.
잊지 않겠다.
다음 작품도 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