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밀 아자르 - 그로 칼랭

 우선 처음 책을 펼치고 몇 장은 정신이 없었다. <자기 앞의 생>을 염두하고 읽기 시작한 나는, 그의 기괴한 말투 덕분에 자꾸만 앞, 뒷장을 뒤적거리며 헤매야 했다. 대화 뿐만 아니라 생각 역시 책에서는 글로 밖에 표현될 수가 없는데, 하필이면 일인칭으로 서술하는 통에, 주변인의 행동에 대한 서술과 대화 내용 마저 믿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계속 읽다보니 말투가 익긴 익었는데 그게, 생각해보면, 익숙해졌다기 보다는 그저 어느 정도 무시하며 읽게 되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런데, 책의 중반부를 넘어 어느새 내가 그로 칼랭과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건, 글을 자세히 읽고 이해가 깊어져서 생기는 감정 이입이 아니라, 그의 사고가 나의 사고와 닮았다는 느낌에서 비롯된, 나도 자각할 수 없는 빠져듦이었다. 사실, 우리 역시 모든 사고의 과정에서 생기는 느낌을 글로 표현한다면, 사고는 무한하고 연속적이나 언어는 유한하고 불연속적이기 때문에, 그로 칼랭과 마찬가지로 단편적이고 의미 없는 (그러면서 또 아예 의미가 없지도 않은) 언어의 파편 만을 보여줄 수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데이빗 린치가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꿈과 사고를 다룬 방식이고, 크리슈나 무르티가 그토록 절절히 느꼈던 삶과 인식의 간극이 아닐까. 이렇게 눈치도 채지 못 하고, 거부도 못 하도록 그로 칼랭에 빠져들게 하는 솜씨가, 로맹 가리와 이주희 씨의 재주라 하겠다.
 일단 빠져들고 나니, 이젠 내 말투 마저 약간 기괴해지고, 혼잣말이 늘면서, 외로움을 타게 됐더랬다. 이미 이 책은 책 만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 삶에 스리슬쩍 스며 들어버렸고, 난 또 기꺼이 흔들려줬는데, 그게 또 약간 자존심 상하고 당황스러운 것이, 그로 칼랭은, 내가 일상 생활에서 만났다면 꽤나 꺼렸을, 심지어 약간은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뒷담화를 깠을지도 모르는, 그런 캐릭터인데, 내가 기꺼이 감정이입하여 우울해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거지가 나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꺼리는 것이 아니고, 나도 또한 그저 소외된 채로, 소통에 대한 희망 고문으로 하루하루 보내다보면 바로 저런 모습일 수 있겠다... 싶었고, 그렇게 생각하면 로맹 가리는 인류 보편의 감정을 다루되, 거기서 딱 한 발자국, 더도 덜도 아닌 딱!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 (그만큼 우리네 삶은 위태롭다는 느낌이다.)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미처 느끼지 못 했던, 또는 느끼지 않으려 애써 피해왔던 인생의 구석구석을 독자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김기덕과도 닮았다.  그리하여 이 책은, 어떻게 보면 황당한 내용을 지녔지만, 한 발짝만 누가 뒤에서 밀어주면 나 또한 그리 하지 말라는 법이 없는 섬뜩한 현실감을 획득한다.

 에밀 아자르의 삶을 뒤집어 쓰고, 우리를 비단뱀 속에 잡아가둔 것으로 두번째 공쿠르 상을 거머쥔 그는, 그런 문학적 성취에 통쾌했을까. 얼마 전, 내가 친구에게, Gros Calin이라는 DJ의 remix가 무척 좋더라는 얘기를 건네었을 때 (그도 또한 꽤나 알려진 뮤지션이다.), 그는 그 DJ가 자기라고 말하며,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