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면 올레TV 마케팅 팀이 큰 보람을 느끼리라.
올레 TV를 켤 때면 목표로 하는 VOD가 있지만,
그걸 다 보고나서 올레 TV에서 영화 소개나 배우 인터뷰, 감독과의 대화 등등 나올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끝낼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다.
씨네21이 정기적으로 배달되는데도, 이래저래 보기를 미루다보니 그저 헌책 모아놓는 박스에 봉지째로 들어가기를 몇 달 째, 스파이크 존즈의 신작도, 미셸 공드리의 신작도 올레TV로 먼저 알게 됐으니 나원참,
어떻게 생각하면 올레TV에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렇게 멍하니 영화 소개를 보다가 보고 싶은 영화들이 생기고 (주로 스마트폰 앱인 왓챠에 기록, 이전에는 메모 앱으로 따로 만들었는데, 이거 나오고 정말 얼마나 편한지), 다음날이나 그 다음날에는 어김 없이 결제 하고 마는 것이다.
식상하고 뻔하고 노골적인 마케팅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나를 스스로 예민하다고 탓하는 경지에 이르른 데다, 불법 다운로드가 아닌 제대로 된 지불을 하고 본다는 뿌듯함이 더해진 탓이다.
국내 배우들이랑 인터뷰하고나서는 올레TV 상품권 같은 걸 선물로 주던데, 아오 부럽다. 나만큼 요긴하게 쓸 사람이 또 있으려고... 정도는 아니지만, 한달 안에 상품권을 탕진할 자신은 있는데, 글쎄.
며칠 전에도 글쎄, 올레TV에서 줄리안 무어가 나오는 영화들을 소개하는 걸 보다가,
예에에에에전에 눈알에 바람 스치듯 봤던 씨네21의 리뷰가 생각났다.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일> 영화평론가 박평식 별 3.5개'
내가 주로 참고하는 영화평론가 박평식 씨가 3.5개의 별을 쾌척한 이 작품, 음 그럼 볼 만 하겠다는 느낌 (엄청 재밌게 봐서 글쎄 컴퓨터 게임까지 사버린 영화 '아바타'가 박평식 평론가로부터 받았던 점수가 3.5였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박평식의 평을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포스팅을 해야겠다), 그 느낌이 TV 리모컨의 버튼을 마구 누르더니 결제를 완료시켰다.
영화는 눈화장이 진한 어머니가 침대에 누운 딸에게 약간은 불길한 가사의 자장가를 불러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해서는, 시종일관 혀를 끌끌 차게 되는데, 혀를 하도 차서 그런지 다음날 혓바늘이 돋아서 지금까지 입이 맵다.
영화는 메이지라는 아이가 이혼한 부모와 보모를 오가며 상처 받는 이야기다.
줄리안 무어와 오나타 에이프릴의 호연 (어떻게 이렇게 아이답게 잘 하는지, 디테일을 지시를 받은 건지 아니면 정말 내키는대로 하면서도 대사 안 까먹고 잘 한 건지, 기특하다 허허.), 그리고 세심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또 경제적으로 상황을 설명해주는 연출 덕에, 다음과 같은 막장 스토리임에도 그다지 거부감 없이 잘 볼 수 있었다.
1. 부모가 이혼함.
2. 아빠는 알고보니 젊은 보모와 바람을 핀 상태였음 - 결혼함.
3. 양육권을 빼앗긴 엄마는 홧김에 + 양육권을 주장하려는 전략적인 선택으로 어떤 바텐더와 결혼함.
4. 아이는 엄마 집 10일, 아빠 집 10일, 이렇게 오가며 지내게 되는데, 드럽게 철딱서니 없어서 지 원할 때만 딸을 찾아서 이쁜 장난감 취급하는 엄마와, 드럽게 책임감이 없어서 가족들에게 삶의 동반자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못 하는 아빠가 각자 제 할 일 하느라 바빠서 메이지는 결국 피 한 방울도 안 섞인 보모 출신 새 엄마와 바텐더 출신 새 아빠 손에서 키워지게 됨.
5. 여기서 하일라이트. 동병상련을 느낀 보모 출신 새 엄마와 바텐더 출신 새 아빠가 눈이 맞아버림.
6. 마침 친아빠도 친엄마도 각자 일이 바빠서 메이지를 방치해둔 상태, 그래서 새 엄마, 새 아빠가 데리고 사는데, 애가 글쎄, 비로소 좀 행복해 보임.
영화에서 메이지의 부모는, 메이지와 있을 때면 자신들이 얼마나 메이지를 사랑하는지 '광고'하지만, 그 외의 일상 중에도 아이가 늘 존재하고 보고 느끼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무심코 하는 행동들로 메이지에게 소외감과 불안을 안겨준다.
그 왜, TV에서도 광고와 광고 사이가 메인 방송 아니던가.
지혜가 곁들여지지 않은 사랑은,
어떤 이에겐 레져 활동이 되고, 혹은 사람 구실을 하고 있다는 자기 위안이 된다.
운이 좋을 때는 아이가 자신이 인형의 대용품이었다는 것을 성인이 되어서야 눈치 채게 되고, 부모는 철 들 필요가 없지만,
보통의 경우 영화의 제목에서처럼 꽤 일찍부터 알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의 호출에 속절 없이 웃음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응하는 아이가 참, 서글프다.
메이지는 영화를 통틀어 한번 불안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데, 새 아빠가 있는 바에서 일하는 종업원, 말하자면 잘 모르는 타인의 앞에서다.
아마 그 종업원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면, 메이지는 그 종업원도 사랑했을테다.
거식증이 생기면서 구토를 자주 한다든지,
원인 모를 피부염으로 밤새 박박 긁어서 피가 난다든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깜박 거리거나 욕설을 뱉는 틱이 생긴다든지,
집안에 있는 물건들은 마구 부순다든지,
하지 않고 그저 순종하고 사랑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하는 메이지와,
그래서인지 별 고민 없이 메이지를 방치하는 부모가 대비되어 혀를 끌끌 차게 만든다.
그나마 사랑을 할 줄 아는 세 사람 (새 아빠와 새 엄마와 메이지)이 모여 가족을 형성하고,
배를 타러 뛰어가는 메이지의 모습에서 힐링의 기미가 보이며 영화를 끝을 맺는다.
근데 이게 또 좀 슬픈 것이, 예전에 친 아빠가 같이 크루즈 여행 가자고 했던 적이 있어서,
메이지의 마음 속에는, 배를 타는 것이 화목한 가정의 실현을 상징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한, 허풍 치기 좋아하는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메이지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킨 욕구가 얼마나 많을지,
크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욕구들을 채우려고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며 괴로워 하지는 않을지,
새 아빠, 새 엄마, 메이지가 이룬 저 가족이 제도권 안에서 인정될 수 있을지,
저런 상황에서 친부모가 양육하지 않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
친부모는 새 아빠, 새 엄마에게 생활비를 꾸준히 줌으로써 양육에 도움을 줄 것인지 (방해만 안 하면 다행이겠다만),
그 와중에 메이지는 또 어떤 상처를 받을지,
이렇게 마치 친 조카 마냥 걱정을 하며 TV를 껐다.
이번 설에 가족들이 모였을 때, 나이에 맞지 않게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아이가 있으면, 애늙은이다 하면서 한번 웃어재끼고 잊어버리지 말고, 어른들이 그 아이에게 불안감을 심어준 적는 없는지 살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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