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왕국에 이은 디즈니의 연타석 홈런 - 빅 히어로, 2014
2004년의 최고의 오락 영화라고 감히 말했던 <인크레더블>을 떠올리게 만드는, 괜찮은, 아아아아주 괜찮은 오락 영화 되시겠다.
로봇 제작에 재능이 있는 아이가, 형의 유품인 로봇과 형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형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파해친다는 얘기...인데,
(다음 줄부터 해당 문단의 끝까지 스포 주의)
어라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로봇 박람회에서 생긴 화재 사고가 교수가 고의로 저지른 일인지, 우연히 사고가 난 건지 확실치가 않다.
교수가 자기가 죽은 것으로 꾸미기 위해 스스로 벌인 자작극이라고 생각해야 앞뒤가 맞기에 그냥 그렇게만 여기고 넘어갔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일부러 그랬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편집이 잘못 된 것인지, 아니면 애시당초 그런 장면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얘기가 있었는데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인지. 허허참.
아무튼 디즈니답게, 악당 끝판왕 말고는 모두가 해피 엔딩이 되도록 깨알 같이 챙겨댄다.
건물 하나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와중에도 아무도 죽지 않고,
이계의 공간으로 사라졌던 교수의 딸도 돌아오고,
교수 딸의 구출 과정에서 손만 남기고 이계의 공간으로 사라진 베이맥스는 무슨 요령을 피웠는지, 그 남겨진 손아귀에 데이터 카드를 남겨서 복원이 된다.
결국 주인공은 형의 죽음을 극복해서 성공적인 대학 생활을 하면서도 도시의 영웅으로서 활약도 쏠쏠히 하고,
심지어 추가 영상에서 프레드는, 몰래 슈퍼히어로 일을 해온 것으로 추정되는 아버지와 상봉하게 된다.
다만 교수가 경찰에 잡혀감으로써, <인어공주>의 마녀 마냥, <미녀와 야수>의 가스통 마냥, 디즈니의 꼼꼼한 해피 엔딩을 완성시키는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낸다.
이렇게 내용만 얘기하고 보면 한 30분 짜리 TV 애니메이션에 비해 나을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액션에 있다.
아이들 대상의 애니메이션이다보니, 픽사나 드림웍스 같은 촌철살인의 유머는 기대하기 힘들지만, 두번에 걸친 전투에서 보여지는 호쾌하고 화려한 액션이 눈을 호강시킨다.
주먹왕 랄프도 전투 액션과 차량 액션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되고, 겨울왕국에서도 얼음성을 짓는 스펙타클 (두말 하면 잔소리, 추위 따윈 두렵지 않다네. 최고.)과 마법을 이용한 전투신이 좋았었는데,
이처럼 요즘 디즈니는 액션에 상당한 공을 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초반에 어느 정도까지는 아예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보일 정도였는데, 그러다보니 디즈니 특유의 넘실거리는 동작이 줄어들어서, <백설공주>와 <인어공주>, 그리고 <알라딘> 등의 넘실거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약간 아쉬울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욱일기를 연상시키는 장면도 있는 등 왜색이 논란이 되는 것 같은데,
원작에서 분위기는 상당히 바뀌었지만, 원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디즈니 디자이너들의 실책이라면 실책이랄까, 아님 이 정도는 좀 봐주지 않을까 라는 무신경일까.
마블 원작의 일러스트에 욱일기가 종종 나오는 걸로 봐서, 작가는 진주만을 피로 물들였던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해 별로 생각을 안 했나보다. (자기 할아버지, 혹은 옆집 친구의 할머니가 포탄에 돌아가셨을 수도 있는데. 쯧쯧.)
잘은 모르지만, 나치의 하켄 크로이츠나 독수리 문양 등등은 꽤나 꺼리면서 욱일기는 강렬하고 재밌는 디자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다.
칸 영화제에서 나치 관련한 언급을 했다가 혼쭐이 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예만 보더라도, 전체주의, 군국주의, 독재에 대한 유럽인의 혐오와 경계는 상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동북아 국가들에게 욱일기 역시 군국주의와 치욕, 상처로 얼룩진 혐오스러운 이미지라는 것을 모르는 백인들만의 세계사는, 얄밉다.
만일 빅 히어로 6의 주인공이 독일 태생이라는 설정에, 베이맥스의 가슴팍에 하켄 크로이츠가 새겨져 있다면 그 백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와서 보자면, 캐릭터에 대한 설정부터 해서 전반적인 이미지들에서 무뇌스럽고 자극적인 건 어느 정도 걸러낸 것 같아서, 작품을 즐기는 데는 크게 방해 받지 않았다.
다만 풍선 위에서 석양을 바라볼 때의 빛의 궤적이 욱일기를 닮은 건 좀 더 주의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쿵푸팬더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이국적이고 신비로워 보이는 이미지를 차용해서 배경으로 삼고 싶어하는 오리엔탈리즘이야 조금 밉다만,
심한 몰이해로 비롯된 모욕적인 표현이 아니라면, 이정도 이미지 차용이야 뭐, 충분히 매력적이다.
나도 역시 인도네시아나 태국의 사원에 있는 벽화나 조각들에 환장하는 데다,
이러한 힌두교의 이미지를 차용한 <3X3 아이즈>라는 일본 만화는 또 얼마나 좋아했던가.
사실 힌두교 신을 모시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3X3 아이즈>를 보면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캐릭터 디자인 슈퍼바이저에게 배우는 베이맥스 따라그리기.
트렌스포머와 퍼시픽림 등 정교하고 장엄한 실사 로봇들이 득세하는 와중에,
극단의 단순함과 절묘한 균형감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 형태가 쿵푸팬더와 비교될 만 한데,
궁푸팬더가 블랙베리라면, 베이맥스는 아이폰이랄까?
아무튼 요즘 가볍게 즐길 만 한 오락 영화로는 이만한 게 없는 듯.
별은 3.5개.